(2015.3.1. / 사순절 2주, 3.1절 기념주일)

 

피난처요 힘이시며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 되시는 사랑의 하나님, 사순절 둘째 주일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암담했던 시절에 분연히 일어나 나라의 독립을 외쳤던 조상들의 열기가 초봄의 훈풍을 타고 귓전에 들리는 때에, 공의로 세계를 다스리시는 주님의 섭리를 생각하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나라와 민족을 위한 저희들의 기도를 들어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의 영광을 높이 드러내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용서의 말씀 :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사함을 얻었도다. (1:13-14)

 

 

1. 겨울황사.

한 주간 잘 지냈는가?

벌써 3월이다. 내일부터 학생들은 개학을 하고 입학을 한다. 우리는 전도를 나간다. 달력을 보니까, 이번 주에(6일) 개구리가 겨울잠에서 일어난다는 경칩이 있다. 우리 모두 봄기운을 ‘만끽’하는 정도는 아니라도, 느낄 수는 있을까?

며칠 전 황사가 왔다. 지독했다. 그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현실과 미래에 대한 암담함’, 꼭 우리 세상을 보는 것 같다고 생각한 것 같다.

우리의 시대를 생각케 하는 또 다른 게 있다. 겨울이다. 사람들이 오늘의 현실을 겨울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가면 봄이 오고 꽃이 핀다. 날씨는 따뜻해지고 눈석임물이 흘러 대지를 적시면서, 생동하는 자연을 맞게 된다.

 

자연이야 그렇지만, 우리 사는 세상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자연은 자연히 기다리면 겨울이 가고 봄이 온다. 그런데 세상은 아무리 기다려도 봄은 멀기만 한 것 같다.

주의 할 점이 있다. 황사는 자연현상이 아니다. 고비사막에서부터 불어와 온 세상을 덮어도, 새-맑은 바람이 불어와 깨끗하게 되는 점은, 겨울 다음에 봄이 오는 상쾌함과 마찬가지이다. 봄이 오기를 기다리듯 말이다. 그러나 봄은 기다리면 저절로 온다. 그것이 자연법칙이다. 그러나 황사는 그렇지 않다. 인간이 범한 자연파괴와 오염의 결과로 아무 때나 온다. 자연은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되지만, 황사는 필사적인 어떤 노력들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저는 우리가 겨울을 맞은 세상을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겨울황사를 맞은 세상을 살아가는 인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사람들은 암담해하고, 몸을 사리고, 이웃에게 무관심하고, 아니 그럴만한 여력이 없이 무정한 채 겨울잠을 자고 있는 듯하다.

 

며칠 후면, 천둥소리와 빗소리에 개구리들이 일어난다고 하는 경칩이다. 사순절 둘째 주일을 맞는 우리에게, 천둥 같이 호명하시는 주님의 음성과 은혜의 빗소리를 듣고 깨어나길 바란다. 그리고 우리에게 맡겨주시거나 부탁하신 일들에 대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시길 바란다.

 

이런 어두운 마음이 드는 사람도 있다. ‘우리가 뭔가를 할 수 있을까?’ 세상에 비해, 굉장히 미약한 우리가 말이다. 그러나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착각이다.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실 줄 믿어야 한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일에 순종하고 충성하는 것이다.

 

 

2. 이스라엘의 운명

한 아이가 죽었다. 수넴여인의 아들이었다. 이유도 모르고 원인도 모른다. 아버지가 일하고 있던 들녘에 나가서, 추수를 하던 중이었는데, 갑자기 머리가 아프다고 한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돌려보냈다. 아이를 무릎에 앉힌 채로 안고 있다가, 좀 참으면 나아지겠지, 싶었다. 그런데, ‘웬 걸?’ 갑자기 죽었다.

이런 일을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성경의 전후문맥을 살펴보다가, 어쩌면 이 아이의 죽음은 단순한 개인의 죽음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성경을 기록한 사람은 다른 차원의 메시지가 투사되고 있는, 뭔가를 본 것 같다. 사람들이, 꿈 많은 아이들과 함께 침몰한 세월호는, 그 의미에 대해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말해주는 것 같다들 한다. 예레미야는 망해가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딸에 비유했다. ‘길르앗에는 유향이 있지 아니한가, 의사가 있지 아니한가? 딸 내 백성이 치료를 받지 못함은 어찜인고!’ 하며 탄식했다. 아무튼!!

 

그 ‘뭔가’에 대한 배경이 무엇일까?

① 아람군대의 끊임없는 무력에 대한 위협은, 시대를 긴장하게 했다. 그리고 ② 지속적인 경제 불황은 마음을 지치고 힘들게 했다. 엘리야 때 큰 기근이 있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도 20년 전 IMF 여파가 아직 있는 것처럼, 그 여파가 계속됐다. 그 예가 어떤 심각한 부채에 시달리는 과부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나타난다. 두 아들을 노예로 팔아야 하는 딱한 상황에 처했다. 더군다나 이와 중에 사마리아가 아람 왕 벤하닷의 군대에 포위되어 굶주렸다. 나귀 머리 하나에 은 팔십 세겔, 비둘기 똥이라고 불리는 것의 사분의 일 갑은 다섯 세겔 했다. 심각한 인플레이, 그마 만큼 궁핍과 굶주림이 극에 달했다. 사람들 사이의 인정은 메마르고, 성문 곁에 있던 나병환자들은 차라리 굶어죽느니, 적에게 가서 항복하자고 한다. 죽이면 어쩔 수 없지만 살려두면 음식이라도 먹게 되니, 차리라 그것을 선택하자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후에도 엘리사를 통해서 그곳에 7년 기근이 예고된다. ③ 남왕국 유다와의 관계는 한 때 평화를 모색하고 그 길로 나가는 것 같지만, 왕조의 이해관계가 달라지자 배반당할 수도 있다. 그리고 실제로 그랬다. ④ 위정자들의 부패와 무능. 이 속에서 백성은 고통당했다. 하나님의 자녀인 이스라엘 백성이 왜 이런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일까?

 

성경에 비슷한 일이 또 있다. 예수님 당시에도 한 소녀가 죽었다. 야이로의 딸이었다. 이 시대도 암담한 때였다. 주후 70년 경에 이스라엘이 두 번째로 망했다. 로마와의 전쟁으로 노인, 어린이, 여자, 무고한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로마의 세계 신질서 체제 속에서 군사적 위협이 용암처럼 흐르고 있었다. 몇 번 말씀드린 바가 있지만, 새로운 화폐경제 체제로, 날품팔이 노동자나 계약직으로 전락시키는 정책, 공공근로 속에서 가정 경제는 더욱 어려워지고, 아니 빚더미에 나앉아, 파탄나기 시작했다. 거라사 광인이 암시하듯이, 심령 깊은 곳에 악마가 지배할 정도로 세상은 고통받고 상처받고 있었다. 차별은 말할 것도 없고, 바리새인, 서기관들의 위선은 백성들을 기만하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수넴 여인의 아들의 죽음은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가?

“아들 없는 여인, 늙은 남편”(열하4:14) 자녀가 없는 집에, 엘리사가 느닷없이 명년에 아들을 안을 것이라고 했다.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속이지 말라고까지 말했다. 그런데 정말 그렇게 됐다. 그런데 갑자기 아이가 죽었다. 여인이 엘리사에게 원망한다. “내가 언제 아들을 구하더이까, 속이지 말라고 내가 말하지 아니하더이까?” 차라리 없었다면 좋았을 것을 있다가 없는 그 부재에 대한 고통을 이렇게 표현한 것일 것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낳은 것과 같은 나라이다. 그런데 그 나라가 멸망한다. 죽은 아이처럼 말이다. 이것이 곧 이스라엘의 운명 아닌가! 뒤에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국을 끓였는데, 사람들이 그 국을 먹기 위해 첫술을 떴다가 깜짝 놀란다. 입에 든 것을 뱉으며 충격을 표현한다. 이 솥에 ‘죽음’이 있다는 것이다.

 

‘추수 때에 당한 느닷없는 아이의 죽음’ 이것은 당대의 전형적인 이스라엘의 운명을, 이 아이를 통해서 보는 것이다. 결실을 맺을 만한 때, 불행을 겪게 된 이스라엘의 모습이다. 이사야를 통해서 주님은 극상품 포도를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섞은 포도)를 맺었다고 탄식하셨다. 솥에 독이 든 것도, 들에서 뭔지도 모르는 들포도덩쿨을 발견하고 거기 들호박을 따서 그 속에 넣었다.

 

주님께서 회당장 야이로를 좇아 그 집에 도착했을 때, 그 분위기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5:38)

 

이것이 이 시대를 사는 우리도 겪고 있는 분위기는 아닐까? 자세히 말하지 않아도 ‘겨울황사’처럼 말이다. 희망과 용기는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3. 이스라엘의 생존비결

서두에 겨울황사를 막기 위해 우리는 뭔가를 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제부터 그 답을 드리려고 한다.

 

수넴 여인이 곧바로 엘리사에게 찾아간다. 감정을 굉장히 억누르고 참고 있다.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사정을 듣고 그 집에 갔다. 정말 아이가 죽어있다. 엘리사가 이 집에 머물 때, 사용하던 방이 있었는데, 바로 그 침상에 눕혀 있었다. 어떤 심정이었을까? 참담했다. 조용히 문을 닫았다. 둘만 있게 됐다. 그리고 기도한다. 영의 사람이고 하나님의 사람이었기에, 당연한 듯 보인다. 하지만, 죽은 생명을 누가 살릴 수 있겠는가? 달리보자면 죽은 운명이나 다름없는 이스라엘을 누가 구원하겠는가? 이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참담함에 대한 어쩔 수 없는 몸부림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34절에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일 보인다. 아이 위에 올라 엎드렸다. 그리고 자기 입을 그의 입에, 자기 눈을 그의 눈에, 자기 손을 그의 손에 댔다. 어떤 의미일까?

당대의 주술적인 행동을 모방한 것 같다고 주석가들은 말한다. 자동차 밧데리가 방전되고 나면, 다른 차의 밧데리로 점프선을 연결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저는 이렇게 본다. 참담하고 애통한 마음에서 나온 행동이었다고 말이다. 이 소년을 살리기 위해 온 몸으로 감싸는 그의 열심과 마음을 이해하고 알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온 몸으로 감싸 안으시듯 이스라엘을 품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소망이 없는 것이다.

입은 호흡을 말한다. 하나님의 숨의 회복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호흡이 끊어짐을 회복시키려는 필사적인 노력이다. 이스라엘도 하나님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된다. 아하시아 왕이 병이 들자 에그론의 신이었던 바알세붑에게 사람을 보내어 병이 낫겠나 물어보라고 한다.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그렇게 하느냐고 엘리야가 꾸짖었다. 이것이 국솥에 들포도덩쿨에서 뭔지도 모르는 들호박을 따서 넣은 것과 같은 행위 아니겠는가? 우리 하나님이, 하나님이 아니어서 세상 것을 의지하고 우상 같은 것을 의지하는가? 하나님을 회복하는 것은 개인에게도 이스라엘에게도 절대적인 것이다.

또 눈은 봄(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비전, 생각, 뜻, 마음을 상실했다. 그래서 살아도 산 게 아니요,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그것을 회복하는 것이다.

손은 무엇일까? 실천이고 행함이다.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가 아니라 알기는 알아도 행하지 않기에, 그 은혜를 느끼지 못하고, 소년은 차디차게 식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도 차디차게 식 식었다. 하나님의 뜻대로 온몸으로 실천하고 순종하고 충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랬더니 성경은 무엇을 증언하는가? 아이의 살이 차차 따뜻하더라.

 

그러나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소년의 몸이 따뜻해지는 것을 감지하기는 했지만, 좀처럼 살아나지 않는다. 엘리사는 힘에 부쳤다. 될 것 같은데, 안되고, 그래도 안돼서 오는 탈진! 경험해보셨는가? 엘리사가 그랬다. 그래서 그 위에서 내려온다.

어떻게 해야 할까? 멘토이자 스승이었던 엘리야는 어떻게 했을까,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리기 위해, 세 번씩이나 이 일을 반복했다. 또 하고, 또 하고. 하다가 자기 몸이 식고 지치면 내려와, 방 안을 돌면서 자신의 몸을 따뜻하게 하고, 그래서 좀 회복되면 또다시 아이를 위하여 필사적인 노력을 다했다. 생명, 영혼을 위해 포기하지 않았다. 이런 끈질김이 부럽다. 이게 우리여야 한다. 엘리사는 다시 한 번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아이 위에 올라 엎드렸다.

 

여러분 여기에서 기적이 일어난다. 포기하지 않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며 다시 도전할 때, 기적이 일어난다. 그 순간 ‘에취!’ 재채기가 나왔다. 일곱 번씩이나 말이다. 일곱 번이라는 것은 완벽해졌다는 것이다. 그의 숨을 막고 있던 것이 재채기를 통해 완벽히 사라졌다. 그리고 살아났다.

 

다 됐다고 생각하는가?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하는가? 아직 끝난 게 아니다. 끝까지 하라.

 

 

4. 전도하는 사순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에게 찾아오셨다. 갑론을박하면서 떠드는 사람도 있었고, 울고불고 통곡하는 사람도 있었다. 주어가 특정인이 아니라 ‘사람들’이다. 우리 시대의 모습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주님이 오시면 갑론을박은 문제도 아니다.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주님의 말씀이셨다. 우리 생각에는 분명히 죽은 것이다. 절망이다. 괴로움이다. 그러나 주님의 눈에는 자는 것이다. 주님께는 생명의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 안에서 소망이 있고, 희락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인가? 주님께서 찾아오시게끔 부르는 일이다. 모시는 일이다. 필사적으로, 긍휼과 자비로 도우실 것이다. 함께 아파하시고 눈물 흘리실 것이다. 고쳐주실 것이다. 낫게 하실 것이다. 회복시켜주실 것이다.

 

엘리사가 그 수종이었던 게하시에게 이런 일을 맡기셨다. 29절 “허리를 묶고, 내 지팡이를 손에 들고 가서, 그 아이의 얼굴에 놓으라.” 자신의 허리를 묶는 일, 지팡이를 손에 들고 달려가는 일, 그리고 그 아이의 얼굴에 놓는 일. 이 세 가지를 부탁받았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진리의 허리띠를 띠라고 했다. 우리가 주님의 진리의 허리띠를 뗘야 한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것이 아니라, 예수가 그리스도이며 구주시며, 주님을 믿는 삶이 진리임을 확신하는 것이다.

지팡이를 손에 들고 달려가는 일은 무엇인가? 십자가다. 문자적으로 나무십자가를 걸고 다니라는 것이 아닐 것이다. 복음의 십자가를 들고 가라는 말일 것이다. 그리고 아이의 얼굴 위에 올려놓는 일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하는 것 아닐까? 즉 전도하고 복음을 전하는 것에 우리가 순종하고 충성하는 것이다.

 

게하시가 그 말대로 먼저 달려가서 지팡이를 놓았다. 엘리사가 왔고, 소년을 살아났다. 저는 이 일이 야이로가 예수님을 모셔오는 일과 같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증거하고 전도하는 일은, 예수님을 모셔오는 일이다. 거기서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 살아났다. 주님이 여러분의 삶에 오시기를 원한다. 동행하시기를 원한다. 고쳐주시고 은혜 주시기를 원한다.

 

왜 전도하면 복을 받는 줄 아는가? 성령을 받으면 일어나는 일이 있다. 이상하게 전도하고 싶어진다. 왜일까 생각해봤다. 성령은 예수를 주라 시인하게 한다. 성령이 하시는 일이 그렇다. 예수님을 증거하는 일을 하신다. 그래서 성령을 받으면 이상하게 전도하고 싶고, 예수를 전하고 싶고, 마음이 좋다.

그런데 성경에서 성령을 선물로 받는 것 보다 더 좋은 것이 있는가? 누가복음은, 이런 주님의 말씀을 전한다. 나쁜 아버지가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이다. 성령이 우리를 인도하시고, 위로하시고, 힘주시고, 복되게 하신다. 순종하게 되면 말이다.

 

경칩, 천둥과 같이 울리는 주님의 음성에, 잠자던 우리가 일어나 전도하는 우리가 됐으면 좋겠다. 먼저 십자가 복음을 들고, 머리 위에 지팡이를 놓듯이, 고통의 자리, 죽음의 자리, 슬픔의 자리에 놓으면, 주님 찾아오셔서 분명코 가장 복되고 좋은 것, 생명까지라도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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