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31 부활절 후 1주, 송년주일, 송구영신
처음과 나중이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 뜻 깊은 송년주일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빗장을 잠그고 들어가는 집 주인처럼 한 해가 마무리 지어지는 날에, 한량없는 은혜로 일으켜 주시고 감싸주신 주님께 감사하며, 내년에는 더욱 더 충성하기로 결단하기 위해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저희들의 마음 중심을 기뻐 받아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의 영광을 높이 드러내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대속자가 되시고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의인의 길은 돋는 햇살 같아서 크게 빛나 한낮의 광명이 이르거니와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걸려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잠4:18-19)
- 도입
2017년 마지막 날, 크든 작든, 저마다 주어진 삶의 몫을 감당하느라 수고하셨다. 어떤 뚜렷한 공을 세우거나 영광의 깃발을 휘날린 것은 아니지만 광야와 같은 인생을 이만큼 걸어왔다는 것만으로도 자비의 하나님은 대견하게 여기신다. 우리 또한 우여곡절, 여러 사연이 있는 인생에서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리자.
오늘은 2017년을 결산하는 날과도 같다. 무엇을 되돌아보고 무엇을 새롭게 결단해야 할까?
- 악한 여호람
왕국의 여호람은 여호와보시기에 악을 행했던 왕이다. 얼마나 미련한가? 혀를 찰 필요 없다. 이게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을 성령은 우리의 양심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신다.
베드로는 주님을 만나고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5:8) 말했다. 왜일까?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 안에는 하나님 두기를 싫어했던 마음이 있었다. 예수를 만나고서 그것을 깨달았다.
바울은 자신이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잘 믿으며 괜찮은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러나 예수를 만나고서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음을 깨달았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아니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마음 한 구석에는 하나님을 중심에 두기를 싫어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 의를 위해 믿음 생활했던 것이나 다름없다. 예수님처럼 자기 목숨을 바치기까지 순종한 적도 없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기를 부인한 적도 없었다.
우리는 어떤가? 하나님과 자기의 의가 자기 속에 공존하면서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고 존엄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죄의 법, 육신의 법, 불순종이 내 안에 여전한 것은 아닌가?
지존하신 하나님이 이곳에, 우리 안에, 우리 가운데 계시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부합하지 못한 마음을 가지고 와서, 자기 유익과 영광을 위해서 나오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께서 죄인을 사랑하시고 복을 주시겠는가? 저주나 화를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하나님의 현존하심을 드러낸 예수님 무릎 밑에서 “나를 떠나소서.” 간곡히 엎드렸다. 우리 역시 이런 마음이 들 때가 있다. 하나님께서 나를 가증스럽게 여기시고 질책하실 것이라는 불안감 때문에 하나님 곁에 스스로 머물 수가 없다. 두려움이 엄습하고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했던 모습에서 피하고 도망치고 싶은 심정으로 몰락한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복음을 들어보라.
베드로는 예수를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의 현존 앞서, 모든 것을 버려두고 즉각적으로 예수를 좇았다. 모든 것을 버려두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나니까, 그동안 하나님께 구했던 모든 것 역시도 부끄러운 자기 욕심임을 깨달았다. 성경은 이런 결단을 우리에게 촉구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십자가 사건이 벌어질 때, 예수님을 배반하고 부인 할 것을 알고 계셨지만, 모두 비겁자가 되어서 도망할 것을 알고 계셨지만 말이다. 이것이 한 없이 넓으신 하나님의 사랑이다.
바울은 그 무엇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했다.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확증되었다고 고백했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었다.”(딤전1:23)고 디모데를 격려한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다. 물론 범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불순종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일부러 모르쇠의 태도를 지니며, “알면서도 잘 안된다.”고 변명을 늘어놓을 때도 있다. 그러나 기억하라.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는 은혜의 법 아래 있기를 바라신다.
(박도환 집사님이 수요예배 때, 순대볶음을 대접했다. 원래 가격은 28,000짜리였는데, 5만원짜리를 먹은 셈이 되었다. 택배냐 퀵서비스냐 하는 오해 때문이었다. 판매자가 예수 믿는 사람이 왜 그러냐고 그러더란다. 이 말에 대한 박도환 집사님의 반응은 무엇일까? “예수 믿기 때문에 행동에 조심해야 한다는 것” 판매자의 말에 실족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 보면서 문정포도나무교회 교인이라는 게 오히려 자랑스럽다.)
- 주상을 없애라.
여호람에 대한 성경의 증언은 무엇인가? 여호와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 그런데 ‘그러나’라는 접속어가 붙어있다. 그는 그의 부모와 같이 하지는 아니하였으니, 그의 아버지가 만든 바알의 주상을 없앴다. 이점을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한다. 분명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왕이지만 바알의 주상들과 우상들을 없앴다. 그러면 이와 관련된 것들도 모두 폐기된다. 관련부처, 선지장, 사람들… 그리고 이렇게도 판단할 수 있다. 그가 어떻게든 하나님을 믿어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독실한 신자는 못된다 해도, 삶의 문제 속에 하나님을 믿어보려고 했다. 잠시 뒤에 이에 대해서 말씀드리겠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이라지만, 연약하고 부족한 것이 많은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실까?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죄인일지라도, 우리 스스로 연약하고 의지가 부족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있는 우상을 버리고 없애기를 바라신다.
꼭 깎아놓은 우상만이 우상이 아니다. 하나님보다 더 하나님처럼 믿는 것들이 우리를 지배한다면 바로 그것이 우상을 섬기는 것이다. 자기가 잘 안다. 어차피 결국에는 자기 성미대로 하거나 고집대로 하고야 말거라는 은밀한 생각을 누구보다 자기 자신이 잘 안다. 우상을 없애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더 크신 뜻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이다.
- 마실 물이 없다.
오늘 읽은 말씀 사이에는 모압왕이 이스라엘왕을 배반한 사건을 보도하고 있다. 아합 왕 때까지 모압 왕 메사는 수십마리의 양털을 바쳤는데, 이제 이게 끊어졌다. 유다왕 여호사밧과 에돔왕이 연합해서 모압왕을 손보려했다. 모압왕을 치러가는 길에 에돔광야길로 갔는데, 7일이 지나도 물을 발견할 수 없었다.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하게 생겼다. 목표점에 다다라보지도 못하고 실패하게 생겼다.
이 세 왕 중에서 제일 먼저 흔들렸던 것은 이스라엘 왕이다. 10절, “슬프다 여호와께서 이 세 왕을 불러 모아 모압의 손에 넘기려 하시는도다.” 이 대목이 바로 하나님을 믿어보려는 그의 의지를 발견할 수 있는 지점이다. 여호와의 이름이 그의 입에서, ‘불평’과도 같은 말이지만 거론되고 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어보려고 하는데, 이러한 위기 앞에 흔들린다.
우리 역시 이런 연약한 믿음이나 마음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가? 조금 어려운 일을 만나고 위기가 찾아오면 낙심이 든다. 이미 졌거나 패했다고, 소용이 없다고 스스로 선언하고 만다. 말이 씨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베드로가 풍랑이 심하게 일어나는 바다 위에서 예수님이 걸어오시는 것을 봤다. 용기가 났다. “주님, 주님이 오라 명하시면 제가 물 위를 걸을 수 있나이다.”(마태14:28) 주님의 명령이 떨어지자, 정말 물 위를 걸어간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이런 용기가 생긴다. 아무런 의지할 것 없고, 가진 것 없고, 삶은 위태롭고 흔들려도, 주님을 바라보고 믿으면, 물 위라도 걸어갈 수 있다.
그런데 베드로가 물 위를 걸어가다가, 심하게 불고 있는 바람을 봤다. 집채 만한 파도가 몰려오는 것도 봤다. 그러자 물속에 점점 빠져들어 갔다.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주님께서 베드로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하고 계신 말씀이다. 뜻하지 않은 어려움에 빠지고 계산하지 못한 위기를 만난다. 믿음이 쉽게 흔들리고 주님을 의심하고 물속에 빠져간다. 슬프다고 스스로 말한다. 포기한다. 낙심한다. 이게 우리의 모습이다.
-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그렇다면 믿음의 사람은 궁한 상황과 어려운 상황에서 무엇을 하는가? 여호사밧이 하나님의 뜻을 물을만한 선지자가 없는 지, 찾는다. 그렇다. 믿음의 사람은 어려울수록, 위기에 처하고 힘든 상황을 만날수록,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섭리가 무엇인지, 분명한 계획이 무엇이며, 어떤 예비하심이 있을지 찾는 사람이다. 사람의 한계에 멈추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한계에 한 걸음 더 내딛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믿음의 성숙을 바라신다.
여호람의 신하들의 입을 통해서 엘리사에 대한 이야기와 근처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곧장 그리로 달려갔다. 그리고 여호람이 자신들이 처지를 말한다. “여호와께서 이 세 왕을 불러 모아 모압의 손에 넘기려 하시나이다.”
하나님은 충분히 도우실 능력과 계획과 섭리를 가지고 계시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주님께 믿음으로 도움을 구한다면 말이다.
엘리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여호와의 말씀이 이 골짜기에 개천을 많이 파라 하셨나이다.” 사실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터무니가 없어 보인다. 뭔가 있어야, 기미라도 보여야 할 것 아닌가? 가뜩이나 목말라 힘든데, 괜한 헛수고 아닐까?!
하나님께서 그걸 모르실까? 1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너희가 바람도 보지 못하고 비도 보지 못하되 이 골짜기에 물이 가득하여 너희와 너희 가축과 짐승이 마시리라 하셨나이다.”(열하3:17)
예전에 잘 아는 장로님이 3년에 걸쳐 성경 전부를 필사했다. 그는 여러 차례 사업의 위기를 맞는 상황에서도 이것만큼은 했다. 사실 처음에는 억지로 시작한 일이었다. 장로가 될 때, 한 번도 성경을 통독한 일이 없어, 양심이 찔렸다. 그래서 시작한 일이다. 귀찮고 하기 싫고 건너뛰고 싶었는데, 그래도 시작한 일이니까, 억지로라도 했다.
사업의 현장은 척박했다. 사람들은 무정했고, 마른 광야와 같았다. 길이 보이지 않고, 이대로 주저 앉아야 하는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때마다 필사한 말씀이 위로가 되고 힘이 됐다. 그리고 지혜를 얻을 수도 있었다. 아무런 길이 없고 사업이 곧 망할 것 같지만, 그는 말씀의 생수를 마시는 듯 했다.
바로 이것이 광야와 같은 인생에 말씀의 골짜기를 파고 은혜의 샘을 파는 것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엘리사가 말한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작은 일이라.” 말을 바꾸면 더 큰 일도 행할 수 있다. “모압 사람도 당신의 손에 넘기시리니.”
- 연결고리
오늘 본문에는 ‘여호와 보시기에’라는 말이 두 번 나온다. 2절에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18절에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작은 일이라.” 2절은 여호람의 악행에 포인트가 있지만 18절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긍휼에 포인트가 있다.
이 포인트의 전환점이 된 계기는 무엇일까?
13절을 보면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에게 말한다. “내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의 부친의 선지자들과 당신의 모친의 선지자들에게 가소서.” 거기나 가서 물으라는 이야기이다. 즉 여호람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13절에서 짧게 여호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 궁색해져서 엘리사의 도움을 받기 위해 하는 말일까? 여호람이 바알의 주상을 없앨 때, 바알의 선지자를 비롯한 다른 선지자들과 결별을 한 셈이나 마찬가지이다. 우상을 없앴기에, 묻고 의지할 데가 바로 여호와 하나님밖에 없다.
우리의 우상을 없앨 때, 위기 속에 길이 찾아온다.
힘들어도 말씀과 기도와 순종으로 은혜의 골짜기를 파기 시작할 때, 충분한 은총이 넘치게 된다.